1987년 한국 헌정체제를 통해 본 제도 디자인의 논리 – 대표성, 효율성, 그리고 책임성을 중심으로 (2019.12)

저자 : 현재호 학술지명 : 의정논총 발행처 : 한국의정연구회 권호 : 14(2) 게재년월 : 2019년 12월 국문 초록 : 이 논문의 목적은 민주화 이후 등장한 소위 ‘87년 헌정체제를 제도 디자인의 핵심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대표성과 효율성 그리고 책임성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는 데 있다. 분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제도 디자인의 세 가지 원리에 비추어본 ’87년 헌정체제는 그 형성에 있어서 대표성이 배제된 가운데 철저한 승자독식에 기반한 기능적 효율성에 그 초점이 두어졌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결과에 있어서도 애초에 의도한 효율성은 물론 책임성의 확립에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것은, ‘87년 헌정체제의 위기는 단순히 체제 운용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 체제의 제도 디자인의 원리에 따른 제도적 조합의 부정합성에서 비롯된 보다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대표성의 부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안체제는 대표성 위에서 효율성과 그 결과로서의 책임성의 원리가 상호 선순환적으로 결합하여 바람직한 결과를 양산해낼 수 있는 조합을 고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현 단계 그러한 조합 중의⋯

한국 ‘식민지 근대화’ 논쟁과 ‘근대성’ 인식의 재검토: 근대성 개념의 간학문적 논의를 중심으로 (2019.12)

저자 : 김두진 학술지명 : 아세아연구 발행처 : 아세아문제연구소 권호 : 62(4) 게재년월 : 2019년 12월 국문 초록 : 한국의 근대성에 관한 논의는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정치적 함의를 던져 줄 만큼 무거운 역사적 쟁점이 되어 왔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론’의 이분법적 인식론적 논쟁은 양측 모두 그동안 상당 부분 설득력과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식민지 수탈」과 「식민지 근대화」간의 기존의 지적 논쟁을 간학문적(間學問的) 논의 -여타 사회과학의 인식의 맥락에서- 를 통해서 근대성 개념의 인식론적 접근의 지향점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전적(事前的) 작업으로 한국 식민지 근대성 논쟁을 둘러싼 기존 비판적 논의의 지적 계보 (혹은 흐름)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성’ 간의 논란을 진전시키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근대성’ 개념에 관한 해석을 복합적 시각과 분석의 맥락에서 다루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식민지 근대성 논의의 시발을 ‘단수의 근대성’ 혹은 ‘일국(一國)의 근대성’의 이해를 넘어서 ‘다중 근대성’(multiple modernities)이 라는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하여, 식민지 근대성의 현상을 ‘단수’의 근대성을 넘어서 ‘전지구적⋯

조선왕조의 수성(守成)은 언제부터인가 : 태종 11년(1411)의 이색(李穡) 비명(碑銘) 사건 (2019.11)

저자 :  박홍규 학술지명 : 정치사상연구 발행처 : 한국정치사상학회 권호 : 25(2) 게재년월 : 2019년 11월 국문 초록 : 이 글의 1차적인 목적은 태종 11년(1411)에 발생한 이색(李穡)의 비명(碑銘)과 관련된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색의 아들 이종선이 아버지의 비명으로 인해 유배에 처해진 태종 11년 6월 29일부터 그가 용서를 받고 유배가 풀린 10월 15일까지 진행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이종선은 엑스트라에 불과했고, 태종은 조연이었으며, 실제 주인공은 영의정 하륜이었다. 하륜의 간지(奸智)와 태종의 묵인(默認), 그리고『태조실록』의 날조(捏造)가 어우러진 이색 비명 사건의 진상을 『태종실록』의 기록을 축차적으로 따라가면서 설명한다. 아울러 이 글은 ‘충성 체계의 전환’이라는 관점을 도입하여 이 사건이 조선 창업의 종착점이자 수성의 시작점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이 글이 갖고 있는 의미다. 이색 비명 사건은 1390년 이후 전개되어 온 충성 체계의 전환 과정에서 생겨나 잠재되어 있던 대립․ 갈등의 요소들이 1411년에 현재화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했다. 만약 그 요소들이 현재화되어 실재적 충돌이 발생했다면, 새로 형성된 신왕조의 충성 체계는 불안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종결됨으로써 충성 체계가 가 안정되고 조선왕조는 수성의 시기로 진입한다.    원문링크

Why, When, How the US Dollar Was Established as World Money, Peace Studies (2019.10)

저자 : 임규택 학술지명 : 평화연구 발행처 : 고려대학교 평화와 민주주의 연구소 권호 : 27(2) 게재년월 : 2019년 10월 초록 : 국제정치경제문헌에 의하면, 미국달러는 미국의 경제규모나, 미국 국가의 정치권력 또는 제도적 발전으로 인해 world money가 되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시장교환 영역이나 국가 간의 관계를 넘어 화패의 본질적인 역할과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은 heterodox theory of money 이론에 입각하여 달러가 world money가 되는 역사적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재해석한 논문이다. 이 논문의 주장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 미국의 경제나 국가의 힘이 아니라 유럽국가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둘째, 미국달러의 세계화는 1970년대 초 브래튼우즈의 붕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셋째, 미국달러의 세계화 과정은 크게 두 개의 특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자기들의 경제부흥과 intro-European trade을 위해 European Payments Union 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만들고 이 제도를 운영하는데 있어 미국달러의 measure of value, unit of account을 유럽국가들간의 신용과 부채를 정리하는데 사용하였고 1960년대 초부터는 다양한 유럽정부와 기업의 부채발행 그리고 은행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