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수성(守成)은 언제부터인가 : 태종 11년(1411)의 이색(李穡) 비명(碑銘) 사건 (2019.11)

2019.11.01
  • 저자 :  박홍규
  • 학술지명 : 정치사상연구
  • 발행처 : 한국정치사상학회
  • 권호 : 25(2)
  • 게재년월 : 2019년 11월
  • 국문 초록 : 이 글의 1차적인 목적은 태종 11년(1411)에 발생한 이색(李穡)의 비명(碑銘)과 관련된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색의 아들 이종선이 아버지의 비명으로 인해 유배에 처해진 태종 11년 6월 29일부터 그가 용서를 받고 유배가 풀린 10월 15일까지 진행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이종선은 엑스트라에 불과했고, 태종은 조연이었으며, 실제 주인공은 영의정 하륜이었다. 하륜의 간지(奸智)와 태종의 묵인(默認), 그리고『태조실록』의 날조(捏造)가 어우러진 이색 비명 사건의 진상을 『태종실록』의 기록을 축차적으로 따라가면서 설명한다.
    아울러 이 글은 ‘충성 체계의 전환’이라는 관점을 도입하여 이 사건이 조선 창업의 종착점이자 수성의 시작점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이 글이 갖고 있는 의미다. 이색 비명 사건은 1390년 이후 전개되어 온 충성 체계의 전환 과정에서 생겨나 잠재되어 있던 대립․ 갈등의 요소들이 1411년에 현재화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했다. 만약 그 요소들이 현재화되어 실재적
    충돌이 발생했다면, 새로 형성된 신왕조의 충성 체계는 불안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종결됨으로써 충성 체계가 가 안정되고 조선왕조는 수성의 시기로 진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