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슈브리프 No. 3] 미얀마 쿠데타와 국제사회의 대응 그리고 미얀마 민주주의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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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쿠데타와 국제사회의 대응
그리고 미얀마 민주주의의 미래
박은홍 (성공회대학교 정치학과)
1. 땃마도(미얀마 군부)는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가?
쿠데타가 일어난 지난 2월 1일은 아웅산 수찌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이하 NLD)세력의 두 번째 집권을 알리는 연방의회의 소집일이었다. 쿠데타는 군이 윈민 대통령에게 사직을 독촉하며 시작되었다. 이유는 2020년 11월 8일의 총선거에 부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군의 조사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윈민 대통령은 당연하게 사직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군은 그를 구속하고 군 출신의 민쉐 제1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어 민 아웅 흘라잉 군총사령관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뒤이어 윈민 대통령과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을 여러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를 들어 기소하였다. NLD 의원 대부분, 그리고 NLD를 지지하는 문화인들도 차례로 구속되었다. 민 아웅 흘라잉 군총사령관은 이 과정을 “헌법에 기반한 합법적인 권력 이양”이라고 말했다.
현행 헌법에는 아웅산 수찌를 겨냥하여 외국 국적의 가족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 없다는 자격 조항을 두었다. 그런데 NLD는 2015년 11월 총선거에서 압승하자, NLD 정부 출범 직후인 4월에 “대통령 위의 직책”으로서의 국가 고문직을 설치하고 이 자리에 아웅산 수찌를 임명하였다. 군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의 장벽을 우회한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NLD가 과반수를 차지한 의회에서는 군의 정치적 권한을 축소하는 헌법 개정이 시도되고, 퇴직한 군 장교가 갈 수 있는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계획되었다. 무슬림 소수 종족 로힝야 난민문제에서는 국제사회가 주장한 ‘인종청소’에 대해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은 전면 부정했으나, 군부대의 지나친 행위가 있었음은 인정했다.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재차 NLD의 압승을 지켜본 미얀마 군부 땃마도는 문민정부 1기(2016-2021)에 이어 5년간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이 이끄는 문민정부 2기 하에서 계속될 군부의 특권에 대한 도전을 인내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쿠데타를 단행했다. 물론 여기에 2016년에 퇴임해야 했지만 임기를 연장해, 올해 7월에 전역 예정인 민아웅 흘라잉 군총사령관의 개인적 야망이 더해졌다.
이번 쿠데타로 NLD-군부 간의 불안정한 동거, 즉 이중권력체제를 기반으로 한 ‘질서 있는 이행(orderly transition)’이 종언을 고했다. 군은 NLD가 압승을 거둔 2020년 11월 총선을 부정선거로 몰아가면서 그 결과를 무효화하였다. 이미 미얀마 군부 땃마도는 승리를 자신했던 1990년 총선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NLD의 압승을 인정하지 않고 폭압으로 대응했던 거부 쿠데타(veto coup)의 전력이 있다. 30년 만에 거부 쿠데타가 재현된 것이다.
2. 2011년 수지-테인세인 협약의 파기
‘질서 있는 이행’은 헌법적 보장 하에서 미얀마 군부 땃마도가 부분적 퇴각을 결정했던 ‘협약에 의한 민주화(pacted democratization)’를 의미한다. 협약의 결정적 계기는 2011년 8월 19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떼인쎄인과 NLD 지도자 아웅산 수찌의 네피도(미얀마의 수도) 회동이었다. 결과적으로 협약의 핵심은 NLD가 군부의 지속적 정치개입을 보장한 2008년 헌법을 수용하는 대신 군부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따른 정치적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2008년에 통과된 현행 헌법은 1990년 총선 때와 같은 선거 참패로 군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에서 2003년 8월에 공표된 ‘7단계 민주화 이행 로드맵’에 따라 제정된 것이다. 이를테면 현행 헌법에 따르면, 행정부에서는 국방부 산하 국군과 내무부 산하 경찰, 그리고 국경부 산하 국경경찰에 대한 통제 권한이 모두 군총사령관 아래에 있으며, 입법부에서는 상-하 양원 각 의석의 25%가 군인들에게 할당되어 있다. 여기에다 이번 NLD 정부 전복의 정당화에 악용된 “합법 쿠데타” 조항(11장 417조)에서는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언하면 권력을 군총사령관에게 이양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 아웅 흘라잉 휘하의 강경파 군부세력은 이 조항을 근거로 ‘합법적 조치’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통령을 구금한 상태에서 군 출신 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기 때문에 사실상 2008년 헌법도 위반한 셈이다. “합법”이라는 군부의 주장은 억지일 뿐이다.
결국 민 아웅 흘라잉은 쿠데타를 통해 2020년 11월 총선 결과를 부정함으로써 2011년 수지-테인세인 협약을 뒤엎었다. 이는 그동안 밟아온 ‘7단계 민주화 이행 로드맵’의 성과를 일거에 파기한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298명이 쿠데타 직후 긴급하게 구성한 연방의회대표위원회(이하 CRPH)는 쿠데타 군부세력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규정하고 국제사회를 향해 이들을 인정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뒤이어 이번 쿠데타에 악용된 2008년 헌법에 대한 전면 부정을 선언했다.
미얀마는 사회주의체제를 경험했고 군부와 민주화세력 간에 ‘길고 끝없는 정치투쟁’(prolonged and inconclusive political struggle)을 거쳐 민주화 이행기에 들어섰다. 이때 이행(transition)의 첫 단계는 정치개방(political opening)으로 지칭되는 자유화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 민주정부의 수립이라는 또 다른 문턱을 넘는 것으로 종료된다. 자유화 단계에서는 정치범이 석방되고, 공론의 장이 허용되며, 검열이 완화되고 비중이 작은 공직자 선거와 시민사회의 부활이 허용된다. 물론 최고 권력자들을 뽑는 공정한 선거경쟁은 허용되지 않는다. 2012년 4월 1일 보궐선거는 자유화 단계의 정점을 찍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선거에서 아웅산 수찌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NLD가 45석 중 43석을 차지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이어 2015년 총선에서 NLD가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집권세력이 되었다. 2015년 11월 총선은 규율민주주의에서 ‘규율’이라는 수식어를 뺀 민주주의로 전진할 수 있는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였다.
선거는 정치적 갈등을 평화적으로 완화시키고 정치적 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이다. 다시 말해 선거야말로 ‘전쟁의 정치’를 넘어 ‘탈무장 민주주의’(disarmed democracy)를 구축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졌다면 선거의 패자는 그 결과에 승복하고 그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다짐한다.
3. 준무장민주주의 vs. 탈무장민주주의
새뮤얼 헌팅턴(S. Huntington)은 선거민주주의의 정착을 포함한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지도자들이 시대정신(zeitgeist)로서의 민주주의를 내면화하고 신념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그렇지만 땃마도는 ‘규율민주주의’(discipline-flourishing democracy), 즉 “(군부에 의한)규율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discipline, no democracy”)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규율민주주의를 합법화하고 군부의 특권을 제도화한 2008년 헌법에 대한 강한 수호의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2015년과 2020년 총선에서의 NLD의 압승과 친군부 정당인 연방단결발전당(USDP)의 참패는 군부가 관리하는 규율민주주의의 벽을 허물고 군에 대한 문민통치의 원리가 작동하는 민주주의 수립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땃마도는 이번 쿠데타로 통해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시대정신(zeitgeist)을 전면 거부해버렸다.
헌팅턴은 1970년-80년대에 걸쳐 있었던 이른바 제3의 민주화 물결의 일반적 요인들(general causes)을 언급하면서, 어떤 특정국가에서의 민주화는 몇 가지의 일반적 요인과 그 나라 고유의 요인들이 결합된 결과라고 보았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반적 요인은 민주화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할 뿐이지 민주화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요인(causes)이 아닌 정치지도자, 대중 등과 같은 ‘요인을 만드는 행위자들’(causers)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군부권위주의 세력 내 지도자들이 시대정신(zeitgeist)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민주화의 필수요건이다.
지난 2 · 1 군부 쿠데타는 군복 입은 군인들이 의회와 내무부, 국방부, 국경부와 같은 합법적 폭력기구를 장악하는 준무장민주주의(semi-armed democracy)를 고수하려는 군부수뇌와 2008년 헌법 개정을 통해 탈무장민주주의, 즉 군에 대한 문민우위라는 민주주의의 최소조건을 충족시키려 하였던 선출된 권력 NLD정부 간의 갈등의 결과였다. 즉, 민주화 이행 전략의 관점에서 2 · 1 군부쿠데타는 2015년 이래 수찌 국가고문과 NLD 문민정부가 분할정복(devide and conquer) 전략을 통해 민주주의를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그래서 병영으로의 복귀를 꾀하는 군부 개혁파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한 결과이다.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군부 내에 이탈자(defector)집단을 만들어내는 전략은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낙인찍은 군부와 맞서고 있는 CRPH, 그리고 CRPH에 의해 구성된 민족통합정부(National Unit Government, 이하 NUG)에게 매우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4. 민족통합정부(NUG)과 아세안의 과제
현재 NLD가 주도하는 CRPH는 범국가휴전협정(NCA)에 조인한 무장반군들과의 연대를 추진하고 있다. 또 2008년 헌법을 대신할 연방헌법, 연방민주주의에 관한 구상과 함께 대안정부로서의 NUG의 출범시켰다. NUG에 참여하게 된 각료 26명 중 절반인 13명이 소수민족 출신이고, 8명은 여성이다. 쿠데타 직후 양곤에서 처음으로 시위를 조직한 27세의 에이 띤자 마웅은 여성·청년·아동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최연소 각료가 되었다. NUG의 각료구성은 종족별, 세대별, 성별 안배가 잘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제사회는 미얀마가 군부와 반군부 간의 내전상태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미국과 EU 등은 쿠데타 주도세력에 대한 제제에 들어갔다. 반면 미얀마의 최대 경제협력국인 중국은 내정불간섭을 주장하면서 사실상 쿠데타 군부세력이 출범시킨 국가행정평의회(SAC)를 승인하려는 분위기이다. 이들은 땃마도가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강압적 평화를 통해 개방경제와 외자도입을 추진한 30년 전 1990년의 상황을 재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미얀마가 실패국가(failed state)로 전락하게 되어 미얀마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모든 국가들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보게 되는 공멸의 시나리오도 염두에 두어서인지 ‘미얀마 위기’ 해결 차원에서 4월 24일 민 아웅 흘라잉 군총사령관을 초청한 아세안(ASEAN)의 ‘내정간섭’에 대해 기대를 표명했다.
물론 미얀마를 회원국으로 두고 있는 동남아국가연합, 즉 아세안(ASEAN)의 입장이 중요하다. 아세안에게 경제성장, 정치 거버넌스, 인권 존중, 부패와 투명성, 마약 거래 등 거의 모든 국제 지표에서 최하를 기록한 미얀마는 부담이었다.
아세안은 2003년 디페인(Depayin) 사건으로 불리는 아웅산 수찌와 그녀의 지지세력에 대한 군사정부의 노골적인 테러 공격이 있은 직후 서방과 함께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미얀마 군부 내 개혁파는 아세안 압박을 차단하는 차원에서 신헌법과 다당제 도입에 기반한 민간정부 출범을 목표로 하는 ‘7단계 민주화 이행 로드맵’을 내놓았고 이는 2011년 정치개방과 경제개방의 기반이 되었다. 내정불간섭이라는 불문율을 넘은 아세안의 압박이 미얀마 군부 내 개혁파의 목소리를 높였고 ‘질서 있는 이행’의 기반이 된 것이다. 2003년에 있었던 아세안의 압박, 그리고 뒤이은 미얀마 군부 내 개혁파 형성의 경험이 민 아웅 흘라잉 군총사령관의 강경노선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거나 NUG와 대화에 나설 수 있는 군부 내 개혁파를 다시 한 번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5. 화해와 연대, 연방민주주의를 향하여
예기치 못했던 미얀마의 위기는 버마종족과 소수종족 간의 화해와 연대의 가능성을 훨씬 높였다. 바야흐로 연방민주주의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샨족의 정치 지도자로서 2005년에 반역죄 등으로 93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2011년 1월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쿤 뚠 우가 희망한 미얀마 민주주의의 미래는 현재 시점에서도 공감을 자아낸다.
“민족 간 화해는 정치회담을 포함한 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화 없이는 화해도 없다. 영향력이 큰 어느 특정세력만으로는 정치적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다양한 의견들이 존중되어야 한다. 소수자는 다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반대로 다수 의견은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선거를 치루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영구적인 평화를 실현하는데 군사적 수단이 그 답이 아니듯이, 지속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선거만이 그 답이 될 수는 없다. 그 해결 방안으로 어떠한 제도를 선택하든 간에 공정한 대우와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환경 하에서 대중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호전적인 구호에 싫증을 느끼는 소수민족 반군 내 청년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의 종족어로 연가를 부르도록 해야 한다.” ¹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후 73년 동안 미얀마는 종족 간 분쟁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민족국가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연방국가를 향한 거대한 기획이 꽃을 피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미얀마 민주진영은 ‘거부 쿠데타’(veto coup)를 ‘거부 혁명’(veto revolution)으로 맞서면서 여러 종족이 차별 없이 공존하는 연방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 HKun Htun Oo. 2012. “Union or All of Us,” Journal of Democracy, vol.23, no.4(October), pp.133-134.
(집필: 2021년 0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