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 in Love 1기 A조 현인택 교수 인터뷰
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폴인러브’ A조는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에게 전공과 관련된 다양한 진로에 대해 소개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선배이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교수로서, 또 제35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였던 현인택 명예교수를 강남의 사무실에서 찾아뵈었다. 현인택 교수는 30년 가까이 정치외교학자로서, 또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자신의 자리에서 남북한의 통일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현재는 명예교수로서 여전히 저술 활동과 학계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현인택 명예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현인택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1954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978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1981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석사를 취득한 후 도미하여 1990년 UCLA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이후 사회과학원 연구위원, 세종연구소 부연구위원을 거쳐 1995년부터 2019년까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2009년부터 2011년에는 제35대 통일부 장관도 역임하였다. 현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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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작년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은퇴하고 명예교수를 역임 중입니다. 은퇴는 하였지만, 여전히 학문적으로 활동적으로 활동하고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에서 한국외교정책 수업과 여러 강연도 하고 있습니다.”
– 교수님께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는 매우 오래된 얘기입니다. 제가 대학을 1974년에 입학했으니 거의 50년 가까이 된 이야기지요. 그 당시는 여러 정치 상황도 좋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어떤 진로를 가질 것인가 고민했었습니다. 원래 고등학교까지는 이과 학생이었고 관련 활동도 많이 했지만 아무래도 제 자신이 문과에 어울리겠다고 생각이 들어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습니다.”
– 교수라는 직업을 결정하기 전에는 신문 기자직을 고민하셨지만 동아일보 광고사건으로 접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대학 입학은 운명의 신에 의해 이끌어진 것 같습니다. 선택 자체가 오롯이 내 몫은 아닌 것 같은 이끌림인 것입니다. 대학 입학 당시(1974년)는 지금과 같은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첫째,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도 아니고 둘째, 정치적으로도 유신체제가 막 시작된 직후인 권위주의 체제였습니다. 청년이었던 저는 정치체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회가 암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의감으로 이러한 사회를 헤쳐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관(官)에 들어가는 것은 정의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등 진로 고민을 거듭했지요. 그 후 우연히 지금은 없어진 홍보관 앞을 지나가면서 고대신문의 기자 모집 공고를 보았습니다. 운명의 신에게 이끌려간 것처럼 하필이면 그 날이 필기시험을 보는 날이었습니다. 선택이란 자기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오랜 시간과 고민 끝에 선택하였지만 결국 중요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인생에서 순간의 선택이 중요한 선택이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시험을 잘 쳐서 합격했고 고대신문 학생 기자가 되었습니다. 기자가 된 후 지금도 인생의 오랜 기간 친구로서 함께한 당시의 선배들에게 혹독한 글쓰기 트레이닝을 받았습니다. 기사를 써오면 야단도 맞고 지적도 받았습니다. 대학 입학 이전 저는 제 스스로 책, 문학을 또래보다 많이 읽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글쓰기가 이것밖에 안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학부 시절의 트레이닝으로 글쓰기와 글을 알기, 남의 글을 읽고 남을 아는 중요한 작업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학문 생활을 하면서도 중요했던 것이 탄탄한 글쓰기와 글 읽기였고 이러한 능력을 키워낸 것이 학생 기자로서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학창 시절 유명한 칼럼니스트이자 저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바넷 레스턴의 칼럼을 종종 읽었습니다. 그분의 칼럼을 동아일보에서 매주 연재했는데, 칼럼을 읽으며 연구도 많이 했습니다. 또 그 시기에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을 보며 그들처럼 특종을 보도하는 기자를 로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 백지 사건을 보면서 절망하게 되고, 언론에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하며 이를 접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자 시절에는 자주 수업을 빼먹어 학점이 좋지 않았으나 다시 3, 4학년 시절 학점을 회복하여 유학을 갈 수 있었죠.”
– 정치외교학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하시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부를 하게 됐으니 교수라는 직업을 가기 위한 하나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학문의 길의 끝은 교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한승주 교수님을 은사로 만났습니다. 만남도 운명적이었다. 군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해보니 한승주 교수님이 바로 부임하신 상황이었습니다. 소위 ‘운명적인 만남’으로 저는 그분의 초대 제자가 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제 관계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승주 교수님은 저의 학문의 스승이자 인생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분이 걸었던 길이 제가 가는 길을 비추는 길이 되었다. 불빛을 보고 길을 따라가게 되듯이 말이죠. 저도 그 훌륭한 분이 롤모델로 계시게 되면서 그분의 길을 따라가다 보니 교수가 됐습니다. 물론 그 길을 처음에 선택한 것은 제 자신이었지만 제 힘으로만 성공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 제35대 통일부 장관 역임하셨습니다. 장관이 되셨을 때의 뒷이야기가 있으십니까?
“당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사실 제가 이명박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의 큰 틀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 출범 이후 입각을 못 해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결국 모든 게 자기 뜻대로 인생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2008년 당시 미국 대사관에서 이명박 정부 출범 바로 전에 제가 외교안보수석이나 외교부 장관으로 가는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했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학교로 돌아왔는데 1년 정도 지나 대통령께서 직접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라고 전화가 왔고 이에 응하였습니다.”
– 장관 재임 시기, 북한에서 교수님의 반통일 죄행록을 발표했습니다. 그때의 심경은 어땠습니까?
“장관 시기 매일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 위협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종북도 아니고, 북한이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 다 갖다 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인 비핵 개방 3000을 만들었는데요. 이 정책은 북한이 비핵화와 개방을 할 경우 1인당 GDP를 3000달러까지 키우겠다는 정책입니다. 이는 남북 모두 잘 살고 북한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의 진보 성향의 학자들은 저를 반북주의자, 북한 붕괴론자라고 비판하고 북한도 그 주장에 동참하더군요. 그러나 북한은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공격하면서도 정부에 여러 요구를 해왔습니다. 제가 만약 북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근본주의적 북한붕괴론자였다면 ‘비핵 개방 3000’이 아니라 ‘비핵개방붕괴’가 되는 게 맞지 않나요? 이를 통해 사람들의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 참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비핵화와 평화 창출. 북한의 발전을 위한 개방만이 남북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장관 당시 카운터파트너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통일전선부장 김양건을 2009년 8월에 만났습니다. 정부 출범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이라 당시 비핵개방 3000은 용도 폐기되었다고 북한은 주장해곤 했지요. 하지만 김양건은 저에게 대뜸 ‘비핵개방3000을 믿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비핵개방 3000을 비난했지만, 북한에게 GDP 3000달러는 너무나도 중요한 제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김양건에게 비핵화와 개방을 하면 그대로 할 테니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내부를 알 수 없는 체제라 그 주장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북한 매체에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을 대통령과 저에게 했습니다. 청와대 내에서는 신변보호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북한의 비난과 위협은 개인적인 신변의 위협이 아닌 곧 정부와 한국을 향한 위협이라고 생각해서 영향을 받지는 않았고 잠도 잘 잤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걱정된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정부의 그런 요직에 있는 사람이 그런 것에 영향을 받으면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균형 있는 남북 대화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남북 대화를 직접 해본 사람입니다. 실무는 나가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대화를 오케스트레이션 했지요. 남북 대화는 서로의 목적이 일치하면 잘 되지만 일치가 안 되면 대화의 결과가 안 좋을 수 있습니다. 남북 대화는 이슈와 레벨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북 대화는 인도주의적 대화(적십자 회담)와 정상회담(고도의 정치적 목적의 대화)으로 나눠집니다. 대화 자체도 간단하지 않으며 내용과 목적에 따라 달라집니다. 정부의 최고 레벨에 있는 장관 등의 고위층이 나서는 대화는 다르니 구별이 되어야 하죠. 남북대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결국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그래서 비핵화 대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핵화 대화의 경중이 각 정부마다 달라 내용과 형태가 다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만 제가 했던 대화는, 기본적으로 북한 비핵화를 추동해서 남북이 서로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의 기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주였습니다. 남북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작성했는데, 그 당시 북한이 대내외적으로 어려울 때였습니다. 탈냉전 바로 직후라서 동구권의 민주화를 본 김일성이 겁이 나서 협상테이블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노태우 정부에 대화를 제의해서 나온 결과가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며 이 시기에 이뤄진 대화가 이후의 남북대화의 기초를 구성했습니다.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는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하에서 군비통제를 하면서 평화의 기반을 다지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성명에 의거해 주한미군이 가진 전술핵을 다 철수했지만 북한은 공동성명을 뒤집고 핵 개발을 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해야 하느냐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북한이 먼저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비핵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핵화가 약속되면 대화할 기반이 생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2009년 8월 김양건을 만난 후 제가 말한 첫 마디가 “김 부장 선생, 우리가 대화할 때는 모든 이슈가 우리 모두의 테이블 위에 있어야 한다. 예외는 없다. 핵도 있어야 한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비핵화 실현이 매우 어렵게 됐습니다. 이미 북한은 핵 개발을 완료했고 실전 배치도 완료한 상태입니다. 비핵화 비관으로 80프로 가까이 왔습니다. 이 정도가 되기 전에 이를 해결했으면 좋았을 텐데 남북뿐만 아니라 국제 조건도 놓여져 있어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도주의적 이슈나 인도주의적 문제로 하는 것은 저는 언제든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건은 필요 없습니다. 인도주의적 남북 대화는 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너그럽게 해도 됩니다. 알다시피 2009년 말 신종플루가 발생했지요. 당시 북한은 타미플루를 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북한에 50만 명분의 타미플루를 줬다. 이는 인도주의적 측면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도 이를 이해하고 논의 후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인도주의적 이슈로 하는 것과 정치 군사에 있어 비핵화 협상 남북 대화는 결이 다르고, 구별되어야 할 입니다.”
– 10년 안에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통일은 쉽게 안 됩니다. 10년 안에 북이 스스로 비핵화하고 체제를 개방해서 노력하면 북한 GDP를 1천 달러에서 3천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겠지요. GDP 3천 달러는 북한 정도의 경제 수준 국가가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완전히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10년 안에 통일이 되기에는 어렵습니다.”
– 대한민국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의 평화는 북한과 관련 있습니다. 따라서 평화는 결국 우리가 북의 위협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 위협은 북쪽의 적대적 정권이 가공할만한 힘이 있을 때 극대화됩니다. 그래서 비핵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북한은 계속 저희를 핵으로 위협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위협이 상당히 줄어든 상태가 바로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위협하는,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평화인 셈이죠. 다음으로 민주주의는 공정과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사회의 규칙에 의해서 공정하게 취급이 되는 그런 제도가 잘 살아있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참정권, 동등한 권리도 좋지만 고도로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민주주의는 제도가 잘 작동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런 느낌을 갖고 제도와 정부를 믿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지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의 완성된 형태는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딱 이것이 민주주의라고 정의하기가 어렵죠. 민주주의는 만들면서 확장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제도란 무한히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의 진화는 무한하기에 그 끝은 없지만, 어느 정도의 단계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에 제가 대학 다닐 때의 제도와 지금의 제도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제도가 민주주의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할 것입니다.”
– 고려대 정외과 후배들에게 추천할 책이나 조언이 있다면?
“책은 제 저서인 ‘헤게모니의 미래’를 추천합니다. 제가 교수로서 배우고 느낀 학문적인 요소가 있으니 일독을 권합니다. 저는 학문 외적으로도 다양한 저서를 읽었는데, 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며 다작과 다독, 그리고 치열한 토론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책이 많은 만큼 좋지 않은 책도 당연히 많죠. 따라서 이를 선별해내는 작업이 필요한데, 여러분이 보고 읽는 만큼 선별이 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책을 전공 서적에 제한하지 말고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글 속에서 느껴지고 얻어지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